그 사건이 있은지 일주일 쯤 지났으려나.
 의외로 학원 아이들은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고, 나 역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사쿠야씨는 그 사건에 대해,

 "아까웠어. 조금 더 잘 됐으면 좋았을텐데. 그래도 오랜만에 스릴 넘치고 괜찮았지?"

 라며 오히려 날 다독였다. 뭐 그렇다는거다, 사실 그 사건은 의미를 둘 필요도 둘 방도도 없다. 새하얗게 잊어도 될 일이 되었다. 시작부터 의미를 둘 필요가 없었으니까.
 자,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당장 내일이 크리스마스이고 난 내일 아르바이트가 있었고 이 사실을 사쿠야씨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내일 데이트하자고 말을 꺼낸 건 나였다.
 ...어쩌지.






 우선은 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세 번 벨이 울리고 받은 점장은 꽤나 호탕한 목소리로,

 "어이, 미령 무슨 일이야? 설마 내일 혼자라서 외로우니까 데이트해주세요라고 부탁이라도 하려는거야? 크핫핫핫핫!"

 이 점장이 미쳤나. 평소엔 소심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쪽지로 건네는 주제에. 목까지 차오른 말을 억누르고 미령은 말했다.

 "아- 그 데이트 건 때문인데요- 내일 알바좀 어떻게-"

 "카핫핫핫 알았어 알았어 걱정하지 마! 내가 가게 문 걸어잠그면 되잖아!"

 안되겠군. 술에 아주 쩔었어. 이대로라면 내일이 아니라 26일 오후 12시쯤에나 일어날 기세야.
 미령은 핸드폰을 끊어버리고 다른 알바생에게 전화했다.

 "저 내일이 백일이예요……. 거기다 엊그제 싸워서 내일밖에 기회가……."

 안 되겠군.

 "당일치기 20만원짜리 아르바이트를 잡았는데, 그만한 급여를 준다면야"

 딸깍.
 아아, 어째서 이 아르바이트는 이런 녀석들만 붙어있는걸까. 평소엔 한도끝도없이 한가한 주제에 이런 때에만 바빠선…….
어쩔 수 없지, 사쿠야씨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용서를 구하자.

 "아 미령? 마침 잘 전화했어, 아 글쎄 오늘 학교에서 나오는데 비가 왔잖아? 미령 네가 먼저 가 버려서 내 우산을 펼쳤는데 바람이 불어서 우산 살 위로 다 날아가버린거야. 청소당번이라 학교도 늦게 끝나서 친구들도 모조리 집에 갔는데말야. 거기다 하필 이럴 때 생리는 터졌지, 집에 오는 버스에선 이상한 아저씨가 더듬질 않나……. 정말 짜증나 죽겠어. 미령, 듣고있어?"

 "아……, 네. 그거 참 큰일이네요. 그래서 지금은 집에서 좀 쉬고있나요?"

 "그게 그렇지가 않다니까. 아까 레밀리아선배한테서 전화가 와서 그 쪽에 다녀오는 길이야. 그런데 자꾸 귀찮게 추근대서 빠져나오느라 그건 그것대로 고역이었다니깐. 근데, 무슨일이야?"


 말할 수 없어. 이런 사쿠야씨에게 말했다간 적어도 보름은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어버려.

 "아하, 아하하…… 내일 데이트 기대하시라구요."

 "그래~ 이런 우울한 기분 한방에 날려버릴만한 데이트로 준비해둬, 믿고 있을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 미령, 힘낼테니까요!"

 "알았어~ 이만 끊을게~"

 그렇게 말하곤 사쿠야씨는 전화를 끊었다. 난 전화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땅을 한 번 쳐다보다가, 하늘을 한 번 쳐다보다가, 그대로 수위실 구석에 주저앉았다.
 난 바보야…….





 크리스마스 한정 아르바이트여서 시급도 좋고 근무시간도 열한시 쯤 부터 오후 세시정도까지니까 저녁땐 놀 수 있으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도 생각 해 봤지만 내가 가진 표는 아침에 입장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조조할인 표였다. 거기다 그 놀이공원은 워낙 인기가 좋아서 이것도 한 달 전에 겨우 예매해 둔 표였고 내 다음다음다음사람을 마지막으로 매진되는것까지 확인하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기억이 있다.
 즉,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니 아르바이트는 소개받은 곳이라 안 나가기도 미묘한 상황이지만.

 "하아……."

 멍하니 시계가 째깍거리는데에 호흡을 맞추며 바라본다. 저 벽시계는 이런 것 따위 아랑곳않고 흘러가겠지. 넌 속 편해서 좋겠구나.
 사쿠야씨, 기대하고 있었는데…….

 '메이린, 572m 풀코스 롤러코스터라는데. 그걸 다 돌면 두 발로 서 있을 순 있을까?'

 전 균형감각이 좋으니까 자신있어요.'

 있잖아 거기 새로 들여온 범퍼카가 2인승에 우승자한텐 상품도 있다는데 그 상품이 곰인형이래. 팬더랑 반달곰 두가지라는데 메이린 넌 역시 팬더가 좋지?

'정말이예요? 우리 꼭 쳐들어가서 모두 다 박살내버리고 오죠!'

 아-아, 정말 기대된다, 그치?

 '그러게요. 이번 크리스마스는 재밌게 놀자구요.




 ……어쩌지…….
 그리고 시계가 세 시를 알리며 울었다. 운다고 해도 두 시간마다 한 번 씩 뎅- 뎅- 두 번 울리는거고 그건 내가 순찰을 나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숙사에 문제는 없는지, 물이 새는덴 없는지 등등.
 이 건물이 크게 오래된 편은 아니어서 손이 가는 일은 그다지 없지만 그래도 혈기왕성한 학생들이 뛰어다녀서 시설 여기저기가 파손되는 경우는 간헐적으로 있다. 발견해서 고쳐도 좋고 민원이 들어와서 수리하러 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왕이면 말 나오기 전에 내가 고치는 편이 좋겠지.
 난간을 잡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간다. 5층 입구부터 1층까지 내려오면서 하는 쪽이 효율이 좋다.

 3층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까,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메이린 선배, 꽤나 복잡한 표정이네요. 고민이라도 있는건가요?"

 나왔다, 관 내 최고의 골칫덩어리 샤메이마루 아야!
 그녀는 계단 위에서 양 팔을 꼬고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선배에게 보일 태도냐.

 "물론 제 태도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아주 못 할 짓도 아니라는거죠. 왜냐면 선배와 전 정말로 정말로 친하잖아요."

 무슨 개소리야.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거야. 무시하면서 올라가려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새로 생겼다는 그 놀이공원, 재밌어보이죠?"

 흠칫,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하필 이럴 때 눈이 마주치다니 실수했어. 그녀와 마주친 내 눈은 내 모든 감정을 내비치고 있으리라.
타이밍이 안 좋았어. 만들어진 빈틈을 파고들듯 그녀가 걸쭉하게 말을 흘려 내 틈으로 집어넣는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놀이공원 표가 매진이라면서요? 선배는 표를 구하셨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군요. 그런데 전 내일 모미지와 산으로 등산을 갈 거라서 말이죠. 제가 그렇게 열심히 설득했는데 이게 잘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자유이용권이 남네요, 오후에서 야간, 밤 새도록 놀 수 있는 크리스마스 특별 이벤트 쿠폰인데 아아 아쉬워라. 그것도 2.인.용."

 자유이용권.
 2인용.
 그것도 내일 쓸 수 있는 절호의 표.
 밤 새도록 놀 수 있는 표!
 이 때 분명 내 동공은 확대되고 호흡은 거칠어졌으며 심장은 빠르게 뛰었을것이다. 왜냐면 내가 한숨을 내쉬어서 그걸 감추려고 했으니까. 안 돼, 저 녀석에게만큼은 약점잡혔다간 죽도밥도 안 된다구. 참아 메이린.

 "어쩔래요 선배? 필요하지 않나요 이 표? 이거, 이거 말예요 이거."

 팔락팔락 내 눈에 들어온 표가 하늘하늘 공기를 가른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흔드는 그 표에 난 마른침을 삼켰다.
 어쩔까, 때려눕힐까. 순간적으로 내 머리에 든 충동에 난 고개를 붕붕 저었다. 저 녀석만큼은 이길 수 없다는걸 지난 2년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덥석 받았다간 뒷날이 두렵다는게 또 함정이다.

 "우리 두 사람의 우정을 생각해선 그냥 드리고 싶지만~ 저도 이 표, 싸게 구한 건 아니어서……."

 뭐지, 뭘 요구하는거지! 몸이냐? 돈이냐? 그것도 아니면 집이냐? 밥? 세금감면? 학생회를 원하는건가!
 내가 혼자서 자기 무덤에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쿠두두두, 무서운 기세로 4층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아야도 나도 눈치챘을 땐 이미 늦어있었다.

 "아-야- 선-배----!!!"

 탓, 탓, 타앗! 경쾌한 리듬으로 세발뛰기를 한 모미지가 그대로 날았고, 난 그녀의 스커트가 정말 길다는걸 새삼 느꼈으며, 착지점에 있던 아야는 미처 모미지를 받을 자세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짹짹짹…….

 눈을 떴을 땐 이미 병원이었다.





 "어라."

 너무나도 동그랗게 눈이 뜨인데다가 어디 한 군데 아픈데도 없어서 난 순간 꿈을 꾼건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천정은 분명 학교 안이고 내가 학교 안에서 신세질 곳이라고 해 봐야 양호실 뿐이었기에 익숙한, 그치만 그렇기에 익숙하기 싫었던 천장에서 시야를 떼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

 멋진 석고붕대가 내 발목에 감겨있었다. 팔도 얼굴도 허리도 아픈 곳 하나 없는데 오른 발목엔 쇳덩이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붕대가 감겨있는 것이었다.

 "어머, 일어났어 메이린?"

 "히에?"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려다보니 사각사각 사과를 깎는 침착한 사쿠야씨가 거기에 있었다.

 "저기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네가 보는 그대로잖아? 잘 모르겠는데 계단에서 아야에 모미지까지 동시에 셋이서 구르는바람에 넌 발목골절. 그것도 낙하할 때 아야 신발 뒷굽이 발목에 명중해서 전치 6주라더라. 덧붙여서 네 넓은 가슴이 받아준 덕분에 다른 두 사람은 전치 30분으로 끝나서 옛날옛적에 집에 갔어."

 "……………………."

 허허 이거 참.

 "이래선 내일 놀이공원도 못 가겠네요. 겨우 표를 손에 넣나 싶었는데……."

 "내일이 아니라 이미 오늘이야 바보야."

 그렇게 말하곤 사쿠야씨는 내 입에 거칠게 사과를 쑤셔넣었다. 손재주가 좋은 그녀가 자른 사과는 표면이 맨들맨들해서 더 맛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적우적.

 "죄송해요 사쿠야씨, 기분 풀어드리려고 했는데……."

 "흥."

 어쩌지, 사쿠야씨 기분을 풀어주려던 일이 이렇게 되어버릴줄이야.

 "죄송해요……."

 "흥."

 아아……. 나란 녀석은 정말.
 난 자괴감에 머리를 무릎 사이에 박았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사쿠야씨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괴롭다. 난 왜 항상 이모양이지? 아니 그보다 이번 건 솔직히 내 잘못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근데 이런 핑계 대 봐야 어차피 안된 건 안된거잖아? 난 안될거야.

 "……바보야. 이제 됐어."

 예? 물어보려 고개를 들려는 순간 따스한 체온이 내 등 뒤를 덮었다.
 작지만 무게가 있는 체온이었다.

 "이제 됐다구. 어쨌든 크리스마스 하루종일 같이 있게 됐잖아? 이걸로 된거야."

 "……사쿠야씨……."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서, 고마워서 참을 수 없었다.
 정말 난 어째서 이렇게까지 바보인걸까.

 "메이린, 메리 크리스마스."

 "……윽… 훌쩍… 네, …사, 사쿠야씨도…… 응…… 히잉……."

 "바보, 왜 우는거야."

 내년엔 꼭 같이 놀아요 사쿠야씨.
 그렇게 다짐하며, 난 멀쩡한 두 팔로 사쿠야씨를 끌어안았다.
 사과향과는 다른 향기가 내 입안에 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네 축설입니다. 울 애기가 책을 써서, 축하하는 의미에서 썼습니다.

중샄이네요. 어휴 이 중샄덕.

보기에 따라선 외전이고, 보기에 따라선 또 본편입니다.

길게 안 쓸게요. 이만!

Posted by 나즈키

블로그 이미지
頷きながら、認めながら
나즈키

공지사항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