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30. 13:13 카테고리 없음

Gerik

 언제나 세상 일이라는 건 무의미하다.
 오늘도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아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범인은 불법체류중인 외국인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수사당국은-"
 흉흉한 이야기로 서민들의 눈을 가리고 높으신 분들은 또 무슨 일을 하려는걸까?
 손에 들고있던 커피잔에서 입을 뗀다. 달콤한 설탕이 입 안에서 지워지고 그 자리를 씁쓸한 커피와 비릿한 프림이 채우는 통에 손에서 떼기가 무섭게 다시금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저런 것 보다는 날씨도 추운데 가스비나 내려주지."
 "오늘도 아인이는 세상 일에 관심이 많구나?"
 TV 앞에서 뜨개질을 하던 아린누나가 나에게 말했다.
 누나의 고운 손이 한땀한땀 엮어가는 저 천은 세상 무엇보다 귀중한 것 아닐까?
 "칭찬 고마워 아인아. 그건 그렇고, 다음 주 부터 시험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태평해도 돼?"
 "괜찮아. 수업이 어려웠던것도 아니고. 시시해."
 언제나 자신 만만이구나 우리 아인이는.
 누나는 그렇게 말하며 뜨개질하던 실을 내려놓고 양 손을 깍지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왜? 할 말 있어? 차라도 타 줄까?"
 "차는 아까 타 줬는걸. 그냥 아인이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는걸까 궁금해서. 이야기 해 주지 않으려나?"
 "아아. 잠시만."
 누나의 말에 보고있던 책에 책갈피를 꽂은 뒤 내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나는 이런 식으로 나를 통해 필터링 된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책의 내용이 딱딱하면 솔직하게 힘겨워하고, 건강하지 못한 내용에는 손사래를 쳤지만 그래도 내가 해 주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책 읽는걸 어려워하는 누나를 위해서 정말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있는건 누나 덕분 아닐까?"
 내 말에 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문맥에 맞지 않게 튀어나온 말이었기에 제대로 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가려 하자 누나가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거야. 고마워 아인아."
 나 원 참. 대체 뭐가 고맙다는건지.
 쇼파에 좀 더 몸을 묻고, 누나에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 집에 자주 오는 몬스터의 언니도 그렇지만 나도 추운 계절은 어지간히 질색이었다.
 책들은 차갑게 식어 어르고 달래 주어야 내 편이 되어주고, 건조해진 공기가 차가운 칼날이 되어 방 안에 차 있으면 뭘 해도 춥고 괴롭다.
 다락방은 확실히 매력있는 존재지만, 어쨌든 춥다.
 그래서 요즘같이 낮에 덥고 밤에 추운 계절에는 새벽에 올라오기보단 지금처럼 저녁때 천천히 식어가는 방 안에 있게 된다.
 "어... 이런."
 아무리 더듬어도 찾는 물건이 손에 닿질 않는다. 커피가 동이 났다.
 어째서일까, 아직 떨어지려면 일주일은 지나야 할 텐데.
 아주 잠깐동안 고심한 결과, 그 녀석이 오가면 커피를 대량으로 소모한다는걸 깨달았다.
 힘들게 덥혀둔 의자가 아까웠지만 커피 없이 책을 읽는것도 아쉬워 무거운 엉덩이를 떼었다.
 찬바람이 몸 뒷편을 살짝 감싸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젠장할. 이게 다 몬스터 때문이야.
 다음 주부터 시험이라며 내 걱정을 하던 누나는 정작 본인도 다음 주부터 시험이면서 부 활동으로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
 벌써 아홉 시가 넘었다. 저녁에 잔소리를 해서라도 귀가시간을 당겨야 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가방을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집 앞 마트에만 다녀올건데 지갑만 있으면 되겠지?
 "...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쇠를 집어들었다가 내려놓았다. 3분이면 될텐데 뭐.
 그렇게 생각하고 지갑 하나에 겉옷 하나를 걸친 채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집 앞에 켜진 가로등 앞에 위 아래로 기다란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꽤나 펑크한,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작업복같은 옷차림의 사내 하나가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어이 꼬마야."
 꼬마, 라는 말을 들은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 180도 가볍게 넘는 내 키가 꼬마로 보일 수 있다니.
 "불 좀 있냐?"
 불? 아. 담배 말인가? 아주 조금 비현실적인 상황에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다. 초면에 반말, 거기다 반팔, 무려 스킨헤드, 게다가 인상마저 험상궂은 아저씨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 '아저씨' 는, 내 생각보다도 좀 심하게 컸다.
 나보다 머리 하나 이상 커다란 키. 220은 되어 보였다. 정말로 가끔 지하철에서 보던, 지하철 문 위에 부딪힐 수 있을 수준이었다.
 "아, 불이요. 불 없는데요. 죄송합니다."
 본능적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빠른 걸음으로 사내의 곁을 지나쳤다.
 "잠깐, 꼬마야. 내 말 안 끝났다."
 "아... 예."
 아까부터 발밑에서 울리는 것 같이 낮은 목소리도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엄청 무서웠다. 육체파는 사절이다. 지능, 아니 대화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내가 말이다. 필요한게 좀 있어서 그런데..."
 돈인가? 물건인가? 인질인가? 뭐지? 장기? 여기서 이렇게 끝나나?
 그런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괴한이 말을 이었다.
 "잠깐 요 앞 마트좀 같이 가자꾸나."
 그 말에 나는 살짝 정신을 놓아버렸다.
 
 마트라니. 괴한과 마트라니, 마트라도 털 셈인가 이 아저씨?
 그런 생각을 하며 앞장서서 걷고 있으려니 아까부터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추위마저 어디로 싹 도망가버린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뒤에서 내 발걸음에 맞추어 저벅저벅 걷고있는 사내가 너무나 신경쓰여 온 신경을 등 뒤로 향하고 있었지만 사내는 익숙한건지 의도한건지 모를 행동으로 내 움직임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마치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것 같아 힐끔 뒤를 돌아보면 내 뒷통수를 빤히 보고 있던 그대로 눈이 마주쳐 나도 모르게 앞만 보고 걷게 되었다.
 대체 이 사내는 내게 뭘 사게 할 셈인걸까? 아니, 내가 마트를 털게 되는건 아닐까?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살아서 집에 갈 수 있을까?
 문단속을 하지 않고 나왔던 일이 벌써부터 떠오르며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누나는 열쇠를 자주 잊고 다니니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라.
 그렇게 어기적어기적 발걸음이 향한 마트에는 저녁 시간의 한산함만이 가득했다. 카운터에 서 있는 아주머니들은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바빠 보였고 매장 내부를 돌아다니는 직원들도 나와 내 뒤의 사내엔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저기, 저 쪽으로 가자."
 동행하고 난 뒤 처음으로 사내가 입을 열었다.사내가 향한 곳은 공산품 코너였다.
 "한 사람에 이거 두 묶음 이상은 안 판다더구나. 좀 많이 필요해서 말이야. 내 대신 두 묶음만 사주면 고맙겠다."
 부탄가스? 이걸 네 묶음이나 대체 뭘 하려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마 내가 유령이 되어 안전함을 장담할 수 있는 상태이거나, 인터넷 저 편에서 대화하고 있는 상태가 아닌 이상 절대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얌전히 부탄가스를 집어들고 말했다.
 "저, 혹시."
 "뭐냐. 말해 봐라."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말 해 보라니까?"
 천천히 다가오는 사내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커커커커커커피좀 사도 될까 해서요. 제가 마침 커피를 사러 나온 참이라"
 "그래라."
 내 우스꽝스러운 말더듬에도 사내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부탄가스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의외로 창작활동이나 뭐 그런걸 하려는걸지도 모르겠다.
 물로켓을 가스로켓으로 진화시키려는 열정어린 공대생이라거나 뭐 그런거.
 그제야 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치운 뒤 인스턴트 커피 번들을 집어들었다.
 사내가 나를 보며 말했다.
 "뭘 사나 했더니 커피였나. 너도 그놈들이랑 똑같구나."
 그놈들이란 대체 누굴까? 하지만 낮은 목소리가 가진 박력 탓인지 도무지 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사실 말하고싶지도 않았다. 어서 빨리 이 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몬스터 때도 그렇고, 요즘 들어 왜 이리 꼬이지.
 사내는 턱짓 한 번으로 나가자고 신호했고 나 역시 0.1초라도 빨리 이 사내와 연을 끊고 싶었기에 강렬히 동의했다. 빠른 걸음으로 계산대에 가다 말고 계산대 옆에 있는 물건이 눈에 띄었다.
 일회용 라이터였다.
 불 좀 있냐던 아까 그 질문이 당연하다는 듯 머릿속을 스쳤고, 나는 나도 모르게 라이터를 함께 계산대에 올려 두었다.
 마트 아주머니는 그런 내 구매품들에 수상쩍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나는 뚱하게 서서 그 스캔을 받는 처지.
 자연스럽게 바코드를 찍으며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학생, 멀쩡해보이니까 그냥 주는데 말이야. 담배나 가스같은거 하는거 하는건 아니지? 나땐 그런일 참 많았는데, 요즘엔..."
 나는 억지로 웃으며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집 가스가 끊겨서요. 한 동안은 이걸로 먹고 살아야해요."
 그러면서 커피믹스를 이렇게 잔뜩 사 가는 녀석이 어디 있어.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변명에 딴죽을 걸었다.
 "어머 그래?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미안해 학생."
 "아뇨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봉투 하나 주세요."
 아주머니와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능숙한 솜씨로 커다란 마트 봉투에 물건을 슥슥 담아 내게 건네준 아주머니는 때마침 진동한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마트 문을 열고 나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 이 녀석. 담배라도 사들고 나온 고딩이냐?"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사내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 위압감에 나는 입만 뻐끔거리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사내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 여기 있어요 부탄가스."
 비닐봉투에서 커피믹스 번들을 빼고 비닐 째로 사내에게 넘겼다. 사내는 들고 있던 자신의 부탄가스를 함께 봉투에 담아 들었다.
 로켓 만드는거 힘내세요, 라고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관뒀다. 민망하기도 하고, 괜한 생각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흠. 고맙게 됐다. 나중에 또 보자."
 네, 하고 아주 짤막하게 대답한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 자리를 빠른 걸음으로 벗어났다. 어떻게 봐도 영 어색한 꼴이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이탈이었다.
 곧바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자꾸만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며 집 주변을 몇 바퀴는 돌았다. 혹시라도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일곱 바퀴를 돌았을까, 빠른 걸음으로 걷는것도 숨이 차올라 무너지듯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토해내고 있으려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찰나 어깨에서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머, 아인아. 여기서 뭐 하니?"
 애써 얼굴을 좌우로 털었다. 고개를 들며 머리를 쓸어올리는 척 하면서 눈물자욱을 지웠다.
 "바깥바람좀 쐬다보니까 괜히 달리고 싶어지지 뭐야. 근데 기운만 빠지고, 역시 안 할래."
 나의 그 말에 누나는 걱정하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야말로 요즘 너무 늦는거 아냐? 전이랑 같은 시간이어도 해가 짧으니까 일찍일찍 다녀야 된다구."
 "응... 알았어 아인아."
 누나는 심기 불편한 일이라도 있었던 것 마냥 내 얼굴을 보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아, 눈치챈건가?
 나는 아직도 남아있는 내 얼굴의 어색함을 감추려고 앞장서서 걸었다.
 "얼른 들어가자. 감기 걸릴 것 같아. 누나도 쉬어야지."
 그래 알았어, 누나는 그렇게 대답하곤 내 뒤를 쫓아와 내 왼손을 잡아주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주먹을 꽉 쥔 채였다는걸 깨닫고 황급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하하, 오랜만에 뛰어서 그런가, 하하하..."
 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엇나간 걱정을 하고 있는거겠지.
 "저기 누나, 그러니까..."
 "괜찮아 아인아. 일단 들어가서 씻고 쉬자. 나도 피곤해."
 "알았..."
 그 때였다.
 내가 대답을 다 하기도 전에, 어딘가 멀지 않은 곳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듯 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폭발음이 왜인지 나는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Posted by 나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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