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 22:34 동방

어느 날. 11/2

 아침부터 그리 유쾌한 시작은 아니었다. 바깥날씨 때문인지 몸은 눅눅했고 이불에서 움직이기도 싫었으며 무엇보다 몸이 노곤했다. 꼼짝도 하기 싫어.
 
타닥타닥타닥.
웅. 더 자고싶다. 이불이 좋아. 추운 바깥은 싫어.

타닥타닥타닥.
누가 창문이라도 열었나? 추워, 이건 좀 이상할정도로 추워. 이불이 작아!

타닥타닥타닥.
시끄러운 동거인에 결국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기숙사에선 좀 조용히 해 주면 안 돼, 아야?"

열심히 타자기를 두드리는 아야선배의 등에 한 마디 해봤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타자기의 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빠바바 빠바- 빠라빠바- 빠라빠바- 빠라바- 자기 BGM이라고 정한 곡까지 틀어놓고 신나게 놀아대는 탓에 짜증이 난 모미지는 한 마디 더 쏘아붙이려다가 포기했다.

'이러다 싸움나면 나만 피곤하지. 방을 나가버리든가 정말...'

오늘따라 선배가 몹시도 거슬렸지만 신경쓰지 않고 PSP를 켰다. 게임 진행도 잘 되질 않아서 흥미가 있는건 아니었지만 일종의 의무감이었다.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어려운 친구를.

자다 깨서 그런지 손이 맘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결국 PSP도 한쪽에 던져두고 핸드폰 메일을 확인한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케로짱이 오랜만에 외출하는 날이었지. 문자를 해 보았지만 답장은 없다.
썩을것 두고보자.

눈꺼풀이 무겁고 몸이 처지지만 필사적으로 이불에서 벗어나본다. 언제나 상대해주던 레밀리아도 문자가 없다. 아무래도 아침잠에 푹 빠진 모양이다. 천구와 흡혈귀는 활동 시간대가 정 반대에 가깝지만 레밀리아는 조금 특별하게 인간의 시간에 맞추고 있었다. 요괴인 주제에 요괴들과 대립까진 아니어도 미묘한 반목감정이 서로에게 있는지 상대하기 불편하다고 한다. 아니 저도 요괴인데요. 멍멍이천구 요괴.

어쩌지. 할 일이 없다. 모처럼 비번인데 이런 식으로 흘려보내기엔 아깝다. 아야 선배를 도울까? 아니 미쳤니 내가. 밤새도록 어딜 싸돌아다녔는지도 모르겠는데 아침에도 저렇게 펄펄나는걸 보면 오늘 집안일은 하나도 안 해놓고 뻗어버릴게 분명하다.
할 수 없지, 설겆이라도 해 두자.

"아야, 큰언니는 어디갔어?"

달그락달그락, 그릇 씻는 소리가 내 목소리에 파묻힐 것 같다. 아니 사실은 물소리가 큰거지 그릇소리는 잠재우면 그만이다. 설겆이 소리가 크단건 그만큼 서로에게 감정이 있다는거지. 지난번에 그릇을 집어던져가며 설겆이하는 통에 대판 싸웠던 기억도 있긴 하지만.

"아아- 나도 잘 모르겠어. 집에 다녀온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집에 다녀오는건가.
그럼 집안일 좀 해 두고 다녀오시지. 맨날 똑같은 옷만 입는 단벌신사주제에 그 옷이 여러벌인 공포스런 녀석들같으니라고.
사실 나도 근무복이 네 벌 있는데다가 그게 다 똑같이 생겼으니 할 말은 아니지만.
아니 난 그래도 사복만큼은 바리에이션이 있다구!!!

스스로에게 변명해봐야 우울할 뿐이다. 설겆이도 빨래도 끝마치니 몸이 피곤해진다.
모르겠다, 쉬는 날이니 더 쉬자.

"뭐 하는거야 선배?"

"새로 시작한 게임. 이 게임 엘프종족 허리가 야들야들해서 눈이 즐거워."

어디의 변태냐 당신. 아저씨냐? 뭐냐? 다섯 덕을 지닌 후계자라도 되는건가.
어깨너머로 보이는 모니터 안엔 과연 몸매 한 번 새끈한 아가씨가 자기 키만한 활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슨 전투개념이지. 활이 아니라 봉인건가. 알게뭐람.

"아, 참. 너 폰에 문자왔더라."

"봤어?"

내 질문에 그녀는 태평하게 대답한다.

"귀찮게 그런짓을 왜해."

하긴, 최근 꽤나 무관심해졌으니까. 같이산지도 2년이 다 되어가니 그럴법도 하긴 한데.

[피곤해서 자고 있었어. 무슨 일이야?]

예상대로다. 해가 중천에 뜰 때 까진 일어나는 법이 없으니까 그럴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나름대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어제 아홉시쯤에 자러간답시고 갔었는데 그 뒤로 대체 뭘 한걸까.

[다른 건 아니고 케로짱이 널 찾더라구. 오랜만에 그 아줌마한테서 도망친다나 어쩐다나.]

문자를 보냈지만 아마 금방 답장이 오진 않겠지.
정말 피곤하다. 정작 내가 잠들어버릴 것 같다.
우... 답장, 금방 와야 할 텐데...



꿈이 좀 이상했다.
아니 보통 꿈이니까 언제나 이상하지만, 난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알아낸 건 그 물건을 가지고있는 녀석이 최종보스같은 느낌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한 명 한 명 말을 묻기도 하고 힘으로 쓰러뜨리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만난 그 녀석은 다짜고짜 내게 안겨 말했다.
"사랑해. 널 보고싶어서 지금까지 기다렸어."
이게 뭐여. 어안이 벙벙한 채 난 침대까지 끌려갔고, 내 옷을 벗기려는 순간 잠이 깼다.


아무래도 옷이 단정치 못했던게 꿈의 원인인 듯 싶었다. 옷을 추스르고 시계를 보니 두 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케로짱을 세시엔 만나기로 했을 텐데, 큰일났군.
핸드폰을 열어보니 역시나 이 녀석들 문자가 잔뜩 와 있다. 아무래도 호수에서 만난단다. 케로짱이라면 몰라도 레밀리아도 호수로 나온다니 이건 꽤나 의외인데. 흔한 일이 아니다. 잘 하면 치르노도 만날 수 있겠는데.

[무슨 일이야? 호수엘 다 나오고.]

문자를 송신하려다 문득 타닥거리는 소리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또 어디론가 나간걸까, 하고 방을 둘러보다 등 뒤로 고개를 돌려보니 얼굴 3cm 앞에 선배의 눈이 있었다. 어이구, 깜짝이야. 이런데서 소리도 없이 퍼주무시다니 귀신입니까 당신? 정말 칠칠맞은걸로는 환상향 제일이다.

[호수가 얼어붙었다고 해서 구경이라도 나가보려고.]

아하. 그런 이유셨구만.
납득한 난 금방 나가겠다고 답장한 뒤 옷을 찾아 껴 입었다.
날씨가 추울테니 좀 든든히 입고 가보자.

케로짱 멱살을 잡기도 하고 레밀리아가 호수를 쪼개버려서 빠졌다 나오는바람에 몸이 얼어붙어 정말로 죽을 뻔 하기도 하면서 꽤나 즐겁게 놀았다. 주로 케로짱의 모자에 레밀리아가 당황했다거나 잡아먹혔다거나 하는 부분이 재밌었다. 깔깔대고 웃다가 브랜디시 스피어... 아니 궁그닐이 내 모자를 날려버렸다는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거다. 응.
그치만 추웠다. 아무리 든든하게 입고 와도 세네시간을 물가, 아니 얼음가에서 논다는건 꽤나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고 사쿠야가 들고 온 도시락이 따뜻했길 망정이지 그나마도 아니었으면 만나고 두시간만에 해체! 할 뻔 했다. 결국 네시간만에 해체! 했지만.
레밀리아는 사쿠야가 질질 끌듯이 날아갔고 케로짱은 무언가 무서워보이는 초록머리 언니가 산에 있는 신사가 아니라 마을로 데려갔다.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따라가는 케로짱을 웃으며 배웅해줬다. 하핫, 한 느낌으로. 
대체적으로 환상향에서 머리칼이 초록색이라는건 그 사람이 강하다는 뜻이라고 언젠가 아야선배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니 인정할 수 밖에 없지. 리글이 강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자들밖에 없는 환상향에 그녀의 능력은 공포 그 자체이니까. 솔직히 아야선배가 맘에 들거나 그렇지 않은 건 그렇다 쳐 두고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별로 없응께.
바람이 한 번 불자 몸 전체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사쿠야가 어떻게든 옷을 말려주긴 했지만 산을 오르면서 불어오는 칼바람은 내 몸을 쪼개버릴 것 같았다. 아야님이라면 따뜻한 바람을 일으켜서 편하게 갈텐데, 아니 그보다 능력 그렇게 사소한데에 써도 되냐고 묻고 싶지만 어차피 그런 질문따위 들어줄 사람도 아니니까 그렇다 쳐 두고. 지친 몸을 이끌고 난 집으로 향했다.

즐겁지만 하루종일 피곤해서 잘 논 느낌은 들지 않았다.
별은 하얀걸로 세 개, 까만거 네 개.
오늘의 일기 끝.
Posted by 나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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