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4. 13:31 동방
- 연정(戀情) - 2. 새해.
"벌써 3개월이나 됐네, 사나에가 온지도."
멍하니 앞산을 보며 레이무가 중얼거렸다.
시간 참 빠르네.
"어머, 벌써 그렇게 됐나요? 낙엽보면서 투덜대던 레이무씨에게 나타났던게 엊그제같은데."
레이무씨의 혼잣말에 놀라선 대답했다.
벌써 그렇게까지 됐나?
"그래... 그래서, 여기엔 좀 익숙해졌어?"
"음.. 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좋은 분들 같아요. 거기에 밥도 맛있구요, 에헤헤."
여기에서 식사해보고 알았지만, 카나코님과 스와코님은 참 비위가 좋은 분들이었달까.
"넌 절대 부엌엔 가지 마. 절-대로."
레이무는 사나에에게 신신당부했다.
냄비를 태워먹기도 했고, 조미료를 잘못 넣기도 했지만 레이무의 찻잔을 깨먹은건 제법 큰 실수였지.
"에헤헤..."
사나에는 부끄러운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그치만, 이런건 좀 익숙해지기 힘들지?"
다시 앞을 보며 갑갑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사나에 역시 그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봤다.
"예, 뭐... 그치만 어떻게 할 수 있는것도 아니고..."
" " 하아... " "
툇마루에 앉은 무녀 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연말이었고, 마리사는 여전히 건재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거겠지. 신사는 과한 음주로 뻗어버린 인요들로 가득했다.
하늘에선 부활을 예고하며 강렬한 노을을 뿌려 지상의 눈들을 물들이고 있는 태양이 있었다.
그 마지막 태양을 보겠다고 모여든 마리사 외 다수의 요괴들. 정작 그 노을아래서 오징어포마냥 퍼져있는걸 보면 한숨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레이무는 일찌감치 나무를 모아 불을 피울 준비를 해 두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에 뜨는 해라도 보겠다고 성화겠지.
푸른 무녀도 사실은 이런 생활에 길들고 있었다.
사나에의 환영회, 월동준비를 하려고 모였던 날, 동지섣달 등 수많은 이유로 마리사는 심심하면 판을 벌렸고, 그 위치는 열에 아홉 하쿠레이 신사였다.
레이무는 귀찮다고 투덜대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으로 준비했고, 사나에 역시 그 축제들을 받아들이며 어울리고 있었다.
"술, 먹고싶지 않아?"
"예 뭐... 먹고나면 괴롭기만 해서..."
묘하게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한 듯, 얼굴색이 나빠졌다.
그런 사나에를 보며 레이무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지금까지 몇번 죽을뻔했지."
"에헤헤..."
그 말대로였다. 사나에가 이렇게까지 축제에서 오래 깨어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마리사를 시작으로 술을 권하는게 한둘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거절하지 못하곤 그녀도 시체놀이에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오늘은 좀 달랐다. 그 누가 권하는 술도 거절하며 카나코의 술잔마저 받지 않았다.
"새해니까, 절대 마시면 안 돼. 하쿠레이의 무녀인걸."
이해는 잘 되지 않았지만 사나에는 긍정했다. 아마 모시는 신에 관한 규율이라도 있는거겠지, 그렇게만 생각 할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일에 휘말릴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노을은 사라져,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레이무가 준비한 모닥불... 이라고 보기엔 조금 큰 나뭇더미에 모코우가 불을 붙였다.
마스터 스파크로 불을 붙이겠다며 난동을 피우는 마리사덕에 조금 고생했지만, 앨리스의 도움으로 마리사는 조용해졌다.
모코우의 손을 빠져나온 불꽃은 순식간에 장작더미 전체에 옮겨붙어 신사 앞을 데웠다.
신사의 축제.
모두가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곳에서, 순간의 정적과 함께 타오른 강렬한 불꽃은 마리사의 가슴에도 옮겨붙어 버렸다.
공허할정도로 강하고 뜨겁게 타오르는 자신의 가슴 속을 주체하지 못한 마리사의 옆모습은 지켜보던 앨리스에게 란의 그것과는 다른 강렬한 불안감을 주었다.
빗자루를 강하게 움켜쥐는 마리사의 모습에 불안감을 주체하지 못한 앨리스의 손이 마리사를 저지하려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이 마리사에겐 신호탄이 되어버렸다.
"잠깐만, 마리사!"
신사 전체에 울려퍼지는 시끄러운 폭죽소리가 앨리스의 외침을 묻어버렸다.
아마도 스이카의 그것이겠지.
새로이 몰두할 무언가를 찾아 빛나는 마리사의 두 눈동자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절망감에 빠진 앨리스의 눈동자.
다른 사람들은 제각각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움직이려던 마리사는 그제서야 자신의 어깨에 놓인 앨리스의 손을 느꼈다. 무언가를 말하려 마리사를 잡고 서 있는 앨리스에게 마리사가 말했다.
"미안, 앨리스. 급하게 생각난게 있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럼 나중에 봐!"
앨리스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걷어낸 마리사는 한쪽 다리를 빗자루에 걸텄다.
"잠깐 마리사, 내 말을 좀...!"
언제나처럼 그녀는 사라져버렸다. 별이 쏟아질 듯 빛나는 눈동자를 한, 은하수같은 금발을 지닌 그녀는.
마리사가 사라진 하늘을 허탈히 바라보다 한숨을 내리꽂으며 고개숙인 앨리스의 시야에, 친근하면서도 장소엔 어울리지 않는 연보라색 잠옷이 눈에 띄었다.
"답답하긴."
"무슨 소리야, 지금 난 말싸움하고 싶은 기분 아냐."
"저 도둑쥐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거야?"
파츄리의 발언에 앨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전히 입은 험하네. 대체 뭐가 궁금한건데?"
"그냥, 호기심."
갑갑한 마음에 앨리스는 후욱, 한숨을 내쉬었다.
묵묵히 파츄리가 기다리자, 토해내듯 앨리스가 말했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그 눈동자가, 무언가를 찾아 나설때의 휘날리는 그 금발이 좋아! 사고치는 실수투성이 손끝이 좋다구!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은 그 송곳니가...
그리고, 그 시원스런 자유분방함이... 좋아."
강하게 외치던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사그라들어 마지막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변했다. 그 말을 들은 파츄리는 한심하다는 듯 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아, 그러니까 네가 마리사를 못 잡는거야."
"무슨 소리야?"
발끈하며 앨리스가 화내자 파츄리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느긋하게 돌아섰다.
"네가 한 말을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그새 잃어버렸나, 혹시?"
휭하니 그녀는 돌아갔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앨리스는 자신의 말을 곰곰이 되씹기 시작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앨리스는 결론지었다.
어떻든 상관없어.
마리사가 거기에 존재해주는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아무리 단점이 많아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고 해도.
난 오직, 내가 사랑하는 너만을 이해.
네가 날 버리는게, 가장 큰 두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