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컥'
"아아 정말, 짜증나!!"
부숴버릴 듯 한 기세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소녀는 얼굴을 천구의 그것마냥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소녀를 보며 또 하나의 소녀는 움찔, 몸을 떨었다.
"정말이지, 일이 생기면 빨리빨리 말 해줘야 할 거 아냐! 이 망할 녀석... 에잇!"
"아얏!"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펜이 튕겨나가 다른 소녀의 손목에 맞고 떨어졌다. 제멋대로 날아가는 펜은, 보기에도 굉장히 위험했다.
"애, 앨리스! 위험하잖아!!"
펜에 맞은 소녀는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떨며 외쳤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억지로 쥐어짜낸 듯 한 그 목소리는 연민과 함께 또다른 감정을 자아내었다.
"닥쳐! 누구 앞이라고 멋대로 지껄이는거야?"
앨리스는 그런 레이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쏘아보았다.
그 고함에 레이무는 몸을 흠칫, 크게 떨었다.
"아... 그 그치만... 크붑?"
"시끄럽게 굴지 마, 난 지금 매우 심기가 불편하니까."
입을 거칠게 움켜쥐고 레이무를 보는 앨리스의 시선은, 남극 바다 깊숙한 곳의 빙하보다 시렸다.
그런 앨리스의 시선을 피하려 애쓰며, 결국 레이무는 중얼거렸다.
"미... 미안해... 조용히 할게... 아얏!"
"뭐야, 그 건방진 말투는? 똑바로 사과하도록 해."
뒤에서 붉은 옷의 인형이 날아왔다. 인형의 손에는 얼마나 날카로운지 짐작도 되지 않을 예리한 나이프가 있었다.
그 나이프를 본 레이무의 눈엔 여태까지의 치욕감이 사라지고 공포감이 급속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알았어! 아니, 알겠습니다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똑똑히 하겠, 꺅, 꺄아아아아악!!"
레이무의 어깨 위로 들려묶인 팔 언저리로부터 타고 내려오는 피.
버둥거리는 레이무를 무시한 채, 팔꿈치 조금 아래에 박혀있던 칼을 뽑아 토시에 닦아낸 앨리스는 말했다.
"사과하랬지 누가 소리지르랬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보네. 흥, 찌그러져있어."
인형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평소와 같이 묵묵히 나이프를 들어 있던 장소에 되돌려두었다.
앨리스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다시 자신의 책상에 앉아 인형을 만들었다.
-
처음엔 분명, 단순한 탄막 싸움인 줄로만 알았다.
유카리와 함께 날아가고 있으려니 앨리스가 나타나서, 다짜고짜 탄막 싸움을 걸어왔다.
저쪽은 앨리스 하나에 이쪽은 페어여서, 그냥 1:1로도 승부가 안 될 이야기였기에 유카리를 뒤로 물리고 상대하고 있었다.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할 무렵, 등 뒤에서 '사중결계'가 발동되었다.
유카리에게 끼어들지 말라고 외치는 순간, 사중결계의 탄막은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 뒤의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기절했던 듯 싶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눈을 떠 보니, 아깐 밤이었는데 석양이 지고 있었다.
못해도 하루는 지났다는 이야기겠지.
주변을 둘러보려고 고개를 움직이는데, 왜인지 몸이 부자연스러웠다.
양 팔은 위로 들려있고, 손목이 움직이지 않는걸 보니 묶여있는 듯 했다.
머리카락이 아래까지 내려와있는걸 봐선 머리끈도 풀려있는 듯 했다.
잠깐. 잠깐. 침착하자. 일단 여긴-
아무래도 앨리스의 방인 것 같았다. 인형이 여럿 있었고, 만들다 만 재료들도 여기저기 있었다.
그래. 앨리스의 방인다. 그치만 왜?
"어머, 깨어났어?"
문을 열고 들어온 앨리스가 나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앨리스? 이게 무슨 짓이야! 풀어줘!"
"헤에- 기껏 고생해서 잡아왔는데 왜? 아니면, 풀어줘도 달아나지 않을거야?"
앨리스는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바라봤다. 이상해. 아니, 이건 위험해.
"자.. 잡아오다니 무슨 얼토당토 않은..."
"거봐, 달아날거잖아. 그러니까 그대로 앉아있어."
그렇게 말한 앨리스는,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잠깐. 이건 위기가 아니라 기회야.
"거기, 잠깐만 앨리스! 도망가지 않을게. 응? 나 팔이 아파서 그래. 풀어줘..."
약간 울먹임까지 섞어 부탁해 보고 있기는 한데, 과연 먹힐까?
"어머, 정말? 잠깐만 기다려~"
순간적으로 앨리스의 얼굴에 깊고 어두운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돌아서서 활짝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런 상황을 보지 못한 레이무는 잠깐이지만,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지. 방금 엄청난 오한이 들었는데.'
앨리스는 내 손목에 묶여있던 끈을 풀었다. 아무래도 내 머리끈으로 묶은 듯 했다.
중력이 당기는 통에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비행을 시도했다.
-
"어라, 레이무 뭐하는거야? 설마... 도망가려고 하는 건 아니지?"
쪼그려앉아서 앨리스는 레이무에게 말을 걸었다.
"당연하지, 멋대로 끌려와서 이런 음침한데서 살까봐?"
'여기선 당당하게 소리쳐주자. 이제 안녕이다, 앨리스.'
'어라.'
'왜?'
레이무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눈치챘다.
"뭐... 앨리스 너 무슨... 쿠헙?!"
레이무는 옆구리를 부수는 듯 한 통증을 느꼈다.
힘을 짜내어 옆을 돌아본 레이무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방 안인데도 구두를 신은 앨리스가 자신의 옆구리에서 발을 떼는 장면이었다.
"흥, 거짓말쟁이. 어차피 너도 똑같아."
"그, 아파, 으앗, 아악, 아아아!!"
발 뒷꿈치를 등에 얹고 강하게 찍어 내렸다. 그리곤 뒷꿈치로 찍어 돌렸다.
앨리스의 그런 행동에 전에없이 강렬한 통증을 느낀 레이무는 괴롭게 울부짖었다.
"크하, 흐윽, 쿠우, 하아..."
"명심해. 넌 이제 내꺼야. 내 인형이라구."
"누, 누구 멋대로... 아악!"
호흡조절도 안되는 상황에서 반항하는 레이무의 손등에 앨리스의 구두가 덮쳐왔다.
찢어버리겠다는 듯 강하게 돌려밟은 뒤 앨리스는 말했다.
"넌. 내. 인형이야. 반항하면, 죽여버릴거야."
"말도 안 돼는 소리하지 마! 이런 일 한다고, 내가 순순히 굴복할 것 같아? 아악!"
이번엔 팔꿈치였다. 구둣발로 강하게 내려찍은 팔꿈치에선 무언가 우둑, 하고 위험한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자신의 처지를 좀 더 확실히 이해할 필요가 있겠네. 다시 묶어두도록 할까."
"놔, 놔! 아파! 아악! 크읏... 왜 이렇게 심한 짓을..."
"아프다구? 심하다구?
내가 너 때문에 입은 상처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냐! 넌, 넌..."
"내가 앨리스에게 뭘 어쨌다고 이러는거야? 왜?"
"시끄러!! 닥치란말야!! 기분 나빠, 사실은 같은 곳에서 호흡하는 것 조차도 기분 나빠!!
멋대로 마리사를 가져가놓고, 마리사를 상처입히고, 내 마리사를 그렇게 이상하게 만들어버렸어!!"
"아..."
레이무도 전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던 일이었다.
다만 마리사에게 어떻게 눈치를 줘야 할 지, 자신도 알 수 없어 그냥 내버려 둔 것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아무래도 완전히- 오해받아 버린 듯 하다.
"3일 전에, 마리사가 신사에 갔었지?
그날 낮에 난 마리사네 집에 갔었어.
그런데 마리사가 외출 준비를 하면서, 나가봐야 해서 오늘은 곤란하다고 하는거야.
그래서 '한번쯤은 나랑 같이 있으면 안돼?' 라고 했더니,
'넌 왜 그렇게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조금은 레이무를 닮아 봐라.' 라는거야.
그래서,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해서 말해버렸어.
네가 좋아서 같이 있고 싶은거잖아! 왜 몰라주는거야! 라고.
그랬더니 마리사가, '시덥잖은 농담을 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집에 가서 한잠 자 보라구.' 라면서 가버렸어."
3일 전, 그 날 역시 신사에 크게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다투고 싸운 것 뿐이었다.
그저 농담삼아, '요즘 앨리스랑 잘 지내?' 라던가 말 했더니 마리사가 멋대로 화내면서 덤볐다니까.
"기다려! 이런 널 마리사가 좋아할 리가 없잖아!!"
"상관 없어, 어차피 마리사는 유카리가 데려갔으니까."
...아.
그 능글맞은 녀석이 오밤중에 나가자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하는건데!!
어차피 그 녀석에게는 손해 볼 일이 하등 없는 문제였다.
제길, 눈치채지 못한 내가 바보였어...
즉, 앨리스는...
자신의 목숨과도 같이 사랑하던 사람을 제물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을 얻은 것이었다.
그 뒤로, 앨리스는 몇번이고 이 방에서 레이무에게 화내고, 때리고, 가끔은 칼로 여기저기 베어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레이무는 이빨을 세우고 화를 내기도 했고, 눈물로 매달리며 애원하기도 했지만 매번 결과는 참혹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과 피부는 여기저기 찢겨나가고, 얼굴과 몸 전체가 눈물범벅 피범벅이 되어 점점 더 엉망으로 망가졌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레이무는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유카리가 못된 장난을 쳐서 재밌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데리러 와 주기를.
탈출한 마리사가 앨리스를 설득하러 와 주기를.
하다못해, 자신의 부재를 알면 홍마관에서라도 누군가 와 줄거라고-.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차라리 죽고싶다고.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날 갑자기, 앨리스는 레이무를 풀어줬다.
"얼른 가서 씻어. 옷도 가져다 줄 테니까 갈아입고."
평소대로라면 의심할 상황이었지만,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또 심한 꼴을 당할 터였다.
하지만, 어떻게 하려고 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쩌지 못하고 쓰러져 버둥대는 레이무를 보더니, 앨리스는 안아올렸다.
"흥, 이렇게까지 망가져 버릴 줄이야... 이래서야 어디 멋진 무녀라는 소릴 듣겠어?"
"아... 으... 우으으..."
레이무는, 자신이 앨리스에게 안겨있다는 사실 자체로 공포감에 떨고있었다.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그러지도 못한 채 그저 앨리스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었다.
앨리스는 손수 욕탕에 데려가 레이무의 구석구석을 씻어 주었다.
따뜻한 물에 담갔더니 완전히 풀어진 레이무는, 온 몸에서 힘이 빠져 오히려 닦기가 수월했다.
목욕이 끝나고, 새로운 무녀복을 입히고 나서 앨리스는 레이무의 상처 곳곳을 치료해 주었다.
치료를 받던 레이무가 간신히 떨리는 입을 열었다.
"왜... 무슨일로 갑작스레 친절하게 해 주시는 거예요? 서... 설마, 전 이제 죽는건가요?"
"하아..."
"부탁이예요, 차라리, 차라리 죽여주세요! 이런 무서운 삶, 더는 살고싶지 않아요, 부디 그 손으로, 절 죽여주세요... 흐윽... 흑..."
레이무의 왼쪽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레이무를 노려보던 앨리스는, 눈물을 훑으며 말했다.
"멋대로 울지 마. 멋대로 죽음을 원하지 마. 너의 그 눈물 한 방울도, 한 순간순간의 삶도 이젠 내 것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앨리스는 레이무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애... 앨리스... 님... 윽.. 끅... 흐윽..."
"울지 말라고 했잖아... 자아... 진정해..."
두어 번 레이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레이무의 등을 다독인 앨리스는, 다시 레이무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신사는 여전히 평화롭다.
그치만, 그 신사의 무녀는 예전보다 더 무감정해졌다고 한다.
그 원인은, 단 둘만이 알고있다.
하쿠레이 레이무와 동일한 재질로 무녀를 만든 인형사와,
인형과 인간의 경계를 없앤 경계의 요괴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