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좋은 분들 같아요. 거기에 밥도 맛있구요, 에헤헤."
여기에서 식사해보고 알았지만, 카나코님과 스와코님은 참 비위가 좋은 분들이었달까.
"넌 절대 부엌엔 가지 마. 절-대로."
레이무는 사나에에게 신신당부했다. 냄비를 태워먹기도 했고, 조미료를 잘못 넣기도 했지만 레이무의 찻잔을 깨먹은건 제법 큰 실수였지.
"에헤헤..."
사나에는 부끄러운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그치만, 이런건 좀 익숙해지기 힘들지?"
다시 앞을 보며 갑갑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사나에 역시 그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봤다.
"예, 뭐... 그치만 어떻게 할 수 있는것도 아니고..."
" " 하아... " "
툇마루에 앉은 무녀 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연말이었고, 마리사는 여전히 건재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거겠지. 신사는 과한 음주로 뻗어버린 인요들로 가득했다.
하늘에선 부활을 예고하며 강렬한 노을을 뿌려 지상의 눈들을 물들이고 있는 태양이 있었다.
그 마지막 태양을 보겠다고 모여든 마리사 외 다수의 요괴들. 정작 그 노을아래서 오징어포마냥 퍼져있는걸 보면 한숨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레이무는 일찌감치 나무를 모아 불을 피울 준비를 해 두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에 뜨는 해라도 보겠다고 성화겠지.
푸른 무녀도 사실은 이런 생활에 길들고 있었다. 사나에의 환영회, 월동준비를 하려고 모였던 날, 동지섣달 등 수많은 이유로 마리사는 심심하면 판을 벌렸고, 그 위치는 열에 아홉 하쿠레이 신사였다. 레이무는 귀찮다고 투덜대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으로 준비했고, 사나에 역시 그 축제들을 받아들이며 어울리고 있었다.
"술, 먹고싶지 않아?"
"예 뭐... 먹고나면 괴롭기만 해서..."
묘하게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한 듯, 얼굴색이 나빠졌다. 그런 사나에를 보며 레이무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지금까지 몇번 죽을뻔했지."
"에헤헤..."
그 말대로였다. 사나에가 이렇게까지 축제에서 오래 깨어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마리사를 시작으로 술을 권하는게 한둘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거절하지 못하곤 그녀도 시체놀이에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오늘은 좀 달랐다. 그 누가 권하는 술도 거절하며 카나코의 술잔마저 받지 않았다.
"새해니까, 절대 마시면 안 돼. 하쿠레이의 무녀인걸."
이해는 잘 되지 않았지만 사나에는 긍정했다. 아마 모시는 신에 관한 규율이라도 있는거겠지, 그렇게만 생각 할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일에 휘말릴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노을은 사라져,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레이무가 준비한 모닥불... 이라고 보기엔 조금 큰 나뭇더미에 모코우가 불을 붙였다.
마스터 스파크로 불을 붙이겠다며 난동을 피우는 마리사덕에 조금 고생했지만, 앨리스의 도움으로 마리사는 조용해졌다.
모코우의 손을 빠져나온 불꽃은 순식간에 장작더미 전체에 옮겨붙어 신사 앞을 데웠다.
신사의 축제.
모두가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곳에서, 순간의 정적과 함께 타오른 강렬한 불꽃은 마리사의 가슴에도 옮겨붙어 버렸다.
공허할정도로 강하고 뜨겁게 타오르는 자신의 가슴 속을 주체하지 못한 마리사의 옆모습은 지켜보던 앨리스에게 란의 그것과는 다른 강렬한 불안감을 주었다.
빗자루를 강하게 움켜쥐는 마리사의 모습에 불안감을 주체하지 못한 앨리스의 손이 마리사를 저지하려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이 마리사에겐 신호탄이 되어버렸다.
"잠깐만, 마리사!"
신사 전체에 울려퍼지는 시끄러운 폭죽소리가 앨리스의 외침을 묻어버렸다. 아마도 스이카의 그것이겠지.
새로이 몰두할 무언가를 찾아 빛나는 마리사의 두 눈동자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절망감에 빠진 앨리스의 눈동자.
다른 사람들은 제각각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움직이려던 마리사는 그제서야 자신의 어깨에 놓인 앨리스의 손을 느꼈다. 무언가를 말하려 마리사를 잡고 서 있는 앨리스에게 마리사가 말했다.
"미안, 앨리스. 급하게 생각난게 있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럼 나중에 봐!"
앨리스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걷어낸 마리사는 한쪽 다리를 빗자루에 걸텄다.
"잠깐 마리사, 내 말을 좀...!"
언제나처럼 그녀는 사라져버렸다. 별이 쏟아질 듯 빛나는 눈동자를 한, 은하수같은 금발을 지닌 그녀는.
마리사가 사라진 하늘을 허탈히 바라보다 한숨을 내리꽂으며 고개숙인 앨리스의 시야에, 친근하면서도 장소엔 어울리지 않는 연보라색 잠옷이 눈에 띄었다.
"답답하긴."
"무슨 소리야, 지금 난 말싸움하고 싶은 기분 아냐."
"저 도둑쥐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거야?"
파츄리의 발언에 앨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전히 입은 험하네. 대체 뭐가 궁금한건데?"
"그냥, 호기심."
갑갑한 마음에 앨리스는 후욱, 한숨을 내쉬었다.
묵묵히 파츄리가 기다리자, 토해내듯 앨리스가 말했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그 눈동자가, 무언가를 찾아 나설때의 휘날리는 그 금발이 좋아! 사고치는 실수투성이 손끝이 좋다구!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은 그 송곳니가... 그리고, 그 시원스런 자유분방함이... 좋아."
강하게 외치던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사그라들어 마지막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변했다. 그 말을 들은 파츄리는 한심하다는 듯 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아, 그러니까 네가 마리사를 못 잡는거야."
"무슨 소리야?"
발끈하며 앨리스가 화내자 파츄리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느긋하게 돌아섰다.
"네가 한 말을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그새 잃어버렸나, 혹시?"
휭하니 그녀는 돌아갔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앨리스는 자신의 말을 곰곰이 되씹기 시작했다.
레이무의 어깨 위로 들려묶인 팔 언저리로부터 타고 내려오는 피. 버둥거리는 레이무를 무시한 채, 팔꿈치 조금 아래에 박혀있던 칼을 뽑아 토시에 닦아낸 앨리스는 말했다.
"사과하랬지 누가 소리지르랬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보네. 흥, 찌그러져있어."
인형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평소와 같이 묵묵히 나이프를 들어 있던 장소에 되돌려두었다. 앨리스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다시 자신의 책상에 앉아 인형을 만들었다.
-
처음엔 분명, 단순한 탄막 싸움인 줄로만 알았다. 유카리와 함께 날아가고 있으려니 앨리스가 나타나서, 다짜고짜 탄막 싸움을 걸어왔다. 저쪽은 앨리스 하나에 이쪽은 페어여서, 그냥 1:1로도 승부가 안 될 이야기였기에 유카리를 뒤로 물리고 상대하고 있었다.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할 무렵, 등 뒤에서 '사중결계'가 발동되었다. 유카리에게 끼어들지 말라고 외치는 순간, 사중결계의 탄막은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 뒤의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기절했던 듯 싶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눈을 떠 보니, 아깐 밤이었는데 석양이 지고 있었다. 못해도 하루는 지났다는 이야기겠지.
주변을 둘러보려고 고개를 움직이는데, 왜인지 몸이 부자연스러웠다. 양 팔은 위로 들려있고, 손목이 움직이지 않는걸 보니 묶여있는 듯 했다. 머리카락이 아래까지 내려와있는걸 봐선 머리끈도 풀려있는 듯 했다. 잠깐. 잠깐. 침착하자. 일단 여긴- 아무래도 앨리스의 방인 것 같았다. 인형이 여럿 있었고, 만들다 만 재료들도 여기저기 있었다. 그래. 앨리스의 방인다. 그치만 왜?
순간적으로 앨리스의 얼굴에 깊고 어두운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돌아서서 활짝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런 상황을 보지 못한 레이무는 잠깐이지만,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지. 방금 엄청난 오한이 들었는데.' 앨리스는 내 손목에 묶여있던 끈을 풀었다. 아무래도 내 머리끈으로 묶은 듯 했다. 중력이 당기는 통에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비행을 시도했다.
-
"어라, 레이무 뭐하는거야? 설마... 도망가려고 하는 건 아니지?"
쪼그려앉아서 앨리스는 레이무에게 말을 걸었다.
"당연하지, 멋대로 끌려와서 이런 음침한데서 살까봐?"
'여기선 당당하게 소리쳐주자. 이제 안녕이다, 앨리스.' '어라.' '왜?'
레이무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눈치챘다.
"뭐... 앨리스 너 무슨... 쿠헙?!"
레이무는 옆구리를 부수는 듯 한 통증을 느꼈다. 힘을 짜내어 옆을 돌아본 레이무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방 안인데도 구두를 신은 앨리스가 자신의 옆구리에서 발을 떼는 장면이었다.
"흥, 거짓말쟁이. 어차피 너도 똑같아."
"그, 아파, 으앗, 아악, 아아아!!"
발 뒷꿈치를 등에 얹고 강하게 찍어 내렸다. 그리곤 뒷꿈치로 찍어 돌렸다. 앨리스의 그런 행동에 전에없이 강렬한 통증을 느낀 레이무는 괴롭게 울부짖었다.
"크하, 흐윽, 쿠우, 하아..."
"명심해. 넌 이제 내꺼야. 내 인형이라구."
"누, 누구 멋대로... 아악!"
호흡조절도 안되는 상황에서 반항하는 레이무의 손등에 앨리스의 구두가 덮쳐왔다. 찢어버리겠다는 듯 강하게 돌려밟은 뒤 앨리스는 말했다.
"넌. 내. 인형이야. 반항하면, 죽여버릴거야."
"말도 안 돼는 소리하지 마! 이런 일 한다고, 내가 순순히 굴복할 것 같아? 아악!"
이번엔 팔꿈치였다. 구둣발로 강하게 내려찍은 팔꿈치에선 무언가 우둑, 하고 위험한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자신의 처지를 좀 더 확실히 이해할 필요가 있겠네. 다시 묶어두도록 할까."
"놔, 놔! 아파! 아악! 크읏... 왜 이렇게 심한 짓을..."
"아프다구? 심하다구? 내가 너 때문에 입은 상처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냐! 넌, 넌..."
"내가 앨리스에게 뭘 어쨌다고 이러는거야? 왜?"
"시끄러!! 닥치란말야!! 기분 나빠, 사실은 같은 곳에서 호흡하는 것 조차도 기분 나빠!! 멋대로 마리사를 가져가놓고, 마리사를 상처입히고, 내 마리사를 그렇게 이상하게 만들어버렸어!!"
"아..."
레이무도 전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던 일이었다. 다만 마리사에게 어떻게 눈치를 줘야 할 지, 자신도 알 수 없어 그냥 내버려 둔 것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아무래도 완전히- 오해받아 버린 듯 하다.
"3일 전에, 마리사가 신사에 갔었지? 그날 낮에 난 마리사네 집에 갔었어. 그런데 마리사가 외출 준비를 하면서, 나가봐야 해서 오늘은 곤란하다고 하는거야. 그래서 '한번쯤은 나랑 같이 있으면 안돼?' 라고 했더니, '넌 왜 그렇게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조금은 레이무를 닮아 봐라.' 라는거야. 그래서,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해서 말해버렸어. 네가 좋아서 같이 있고 싶은거잖아! 왜 몰라주는거야! 라고. 그랬더니 마리사가, '시덥잖은 농담을 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집에 가서 한잠 자 보라구.' 라면서 가버렸어."
3일 전, 그 날 역시 신사에 크게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다투고 싸운 것 뿐이었다. 그저 농담삼아, '요즘 앨리스랑 잘 지내?' 라던가 말 했더니 마리사가 멋대로 화내면서 덤볐다니까.
"기다려! 이런 널 마리사가 좋아할 리가 없잖아!!"
"상관 없어, 어차피 마리사는 유카리가 데려갔으니까."
...아. 그 능글맞은 녀석이 오밤중에 나가자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하는건데!! 어차피 그 녀석에게는 손해 볼 일이 하등 없는 문제였다. 제길, 눈치채지 못한 내가 바보였어...
즉, 앨리스는... 자신의 목숨과도 같이 사랑하던 사람을 제물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을 얻은 것이었다.
그 뒤로, 앨리스는 몇번이고 이 방에서 레이무에게 화내고, 때리고, 가끔은 칼로 여기저기 베어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레이무는 이빨을 세우고 화를 내기도 했고, 눈물로 매달리며 애원하기도 했지만 매번 결과는 참혹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과 피부는 여기저기 찢겨나가고, 얼굴과 몸 전체가 눈물범벅 피범벅이 되어 점점 더 엉망으로 망가졌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레이무는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유카리가 못된 장난을 쳐서 재밌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데리러 와 주기를. 탈출한 마리사가 앨리스를 설득하러 와 주기를. 하다못해, 자신의 부재를 알면 홍마관에서라도 누군가 와 줄거라고-.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차라리 죽고싶다고.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날 갑자기, 앨리스는 레이무를 풀어줬다.
"얼른 가서 씻어. 옷도 가져다 줄 테니까 갈아입고."
평소대로라면 의심할 상황이었지만,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또 심한 꼴을 당할 터였다. 하지만, 어떻게 하려고 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쩌지 못하고 쓰러져 버둥대는 레이무를 보더니, 앨리스는 안아올렸다.
"흥, 이렇게까지 망가져 버릴 줄이야... 이래서야 어디 멋진 무녀라는 소릴 듣겠어?"
"아... 으... 우으으..."
레이무는, 자신이 앨리스에게 안겨있다는 사실 자체로 공포감에 떨고있었다.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그러지도 못한 채 그저 앨리스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었다. 앨리스는 손수 욕탕에 데려가 레이무의 구석구석을 씻어 주었다. 따뜻한 물에 담갔더니 완전히 풀어진 레이무는, 온 몸에서 힘이 빠져 오히려 닦기가 수월했다. 목욕이 끝나고, 새로운 무녀복을 입히고 나서 앨리스는 레이무의 상처 곳곳을 치료해 주었다. 치료를 받던 레이무가 간신히 떨리는 입을 열었다.
"왜... 무슨일로 갑작스레 친절하게 해 주시는 거예요? 서... 설마, 전 이제 죽는건가요?"
"하아..."
"부탁이예요, 차라리, 차라리 죽여주세요! 이런 무서운 삶, 더는 살고싶지 않아요, 부디 그 손으로, 절 죽여주세요... 흐윽... 흑..."
레이무의 왼쪽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레이무를 노려보던 앨리스는, 눈물을 훑으며 말했다.
"멋대로 울지 마. 멋대로 죽음을 원하지 마. 너의 그 눈물 한 방울도, 한 순간순간의 삶도 이젠 내 것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앨리스는 레이무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애... 앨리스... 님... 윽.. 끅... 흐윽..."
"울지 말라고 했잖아... 자아... 진정해..."
두어 번 레이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레이무의 등을 다독인 앨리스는, 다시 레이무를 치료하기 시작했다.